대한민국 무장독립투쟁의 산증인, 광복군 채원개 선생님
9월의 독립운동가로 광복군 출신 채원개(1895.3.24~1974.2.16) 선생이 선정됐다.
채원개 선생님은 한국사 1급을 가지고 있는 산적도 처음 들어보는 분이다.
하지만 경력이 정말로 화려하시다. 내가 아는 무장독립투쟁은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 그리고 김원봉.
딱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라서 한번 제대로 파헤쳐 보자.
국가보훈처의 보도자료를 보면
“선생이 청년시절3·1 운동을 시작으로 독립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거쳐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의 긴 여정을 통해 조국의 독립에 헌신했다”며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완전 대한민국 무장독립투쟁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 채원개 선생님의 무장독립투쟁의 역사.
-선생은 평안남도 영원 출신으로 대한독립단 통 임지 구 지대장, 황포 군관학교 교관, 광복군 참모 처장, 광복군 제1지대장 등을 역임하며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제3여 단장, 제2사단장을 거쳐 49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 고향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으나 탈옥해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유하현 삼원포에서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그의 부탁으로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으로 활동했다.
-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대한독립단 통 임관 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해 관통상을 입은 끝에 철수했다.
- 1921년 통의부 대표로 김창환·심용준 등과 함께 상해로 파견되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상해에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 6월에는 낙양 군관학교에서 기병과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으며 중국 군벌의 내전에도 참여해 본격적인 실전 경험을 쌓았다.
-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정의부와 참의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직접 지도자들을 만나 갈등을 봉합하고 성공적으로 중재했다.
- 1927년 황포 군관학교 교관으로서 제대로 된 군사 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 투쟁하던 조선인들에게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 1934년에는 광동 주재 중국군에 복무하면서도 한국독립당 광동 지부에 가입해 독립운동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광주에서 중국군으로 재직 시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 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이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했다.
-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해 참모 처장, 1943년 총무처장 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으나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부임해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했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광복군 제1지대를 이끌고 광복군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미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해 부대를 해체해 부하들을 먼저 귀국시킨 뒤 1946년 상하이에서 선편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뒤 제3연대 작전참모로 부임한 이후 제3여 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했고 1949년 준장으로 예편했다. 뭐 이 정도면 무장독립투쟁의 역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2. 한국광복군에 대하여
-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 국군이다.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 당군(黨軍)과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성립 전례식을 갖고 결성되었다.
-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를 흡수하여 규모가 확대, 개편되었다.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통솔하였던 사람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이었다.
광복군은 1944년까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 국민혁명군의 통제를 받다가
1944년 8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다.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1946년 귀국했다.
3. 황포 군관학교
- 독립운동사에 자주 등장하는 중국군 사관학교라고 보면 된다.
1924년 중화민국 중국 국민당 광저우 정부가 광저우 황푸에 세웠던 사관학교다.
정식 명칭은 "국민당 육군 군관학교".
국민당 정부가 난징으로 옮겨간 1927년 이전까지 황푸에 있었고
우한에 분교가 있었는데, 분교 재학생들도 황포 군관 출신으로 간주한다.
- 많은 조선인 출신들도 이 군관학교를 나온 바 있다.
확인되는 사람만 200여 명이며, 이들은 일제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
만주지역 출신으로 위장했다고 한다.
- 대표적으로 의열단이 암살ㆍ파괴활동에 한계를 느끼게 되어
해체하면서 단원들이 단체로 입교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김원봉은 4기생이다.
의열단 출신인 김원봉을 장제스가 적극 지원해준 것도,
황포 군가요라는 인맥으로 엮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김원봉은 장제스와의 관계 때문에 후에
북한에서 숙청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