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이자 배우인 미스에이 수지는 9월 4일 태권도의 날에 왜 후원금을 기부했을까? (feat. 태권도의 날 소개)

 

인터넷에서 지금은 배수지,

나에겐 Miss A의 수지 야이 태권도의 날 기념으로 기부했다고 한다.

왜? 그리고 태권도의 날은 뭐야?

전직 해외태권도 사범이었던 나에게 좀 큰 의미로 다가와서 찾아봤습니다.

호기심 대마왕이라고 불리는 산적 아재가 한번 밝혀봅니다.


1. 배우가 된 수지는 왜 태권도 단체에 기부했는가?

- 시중 선전지의 기레기들은 "원래 기부를 많이 해서 한 것이다."라고 적었던데,

절대 아닙니다. 배수지 양은 태권도 2단인 당당한 태권도일 뿐만 아니라 

배수지 양의 아버님이 광주 태권도 도장 관장님이셨고

지금은 세계 청소년 태권도대회 단장이 되셨습니다. 

 

태권도 가족, 배수지네

그리고 9월 4일에 후원금을 받은 단체도 눈길을 끄는데,

단체 이름이 "행복 나눔 태권도연합회"라고 한다.

이 단체는 태권도를 통한 봉사, 그중에서도

해외 태권도 보급에 주력하는 곳인 거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pbj0664

 

사단법인 행복나눔태권도연합회(행복나누리 시범단) : 네이버 블로그

사단법인 행복나눔태권도연합회는 행복나누리 태권도시범단과 태권도 지도자들이 함께 나누는 봉사단체입니다

blog.naver.com

배수지 양은 태권도의 날을 맞아

행복 나눔 태권도 연합회 측에 5000만 원의 후원금을 전달했고

배수지 씨는 이번뿐만 아니라 그간 꾸준히 선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5년에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791번째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배수지 씨의 이전 기부활동은

지난해 2019년 4월 강원도 산불 피해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희망 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에 1억 원을 기부했고,

지난 8월에도 수재민들을 위해 1억 원을 기부하는 등 선행을 펼쳐왔다.

 

배수지양 최고! 실천력 짱

 

2. 태권도의 날이 뭐지?

- ‘태권도의 날’은 태권도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제고하고

태권도 보급을 도모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로,

2006년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이

태권도가 올림픽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날인 9월 4일로 정하였고,
이후, 2007년 『태권도 진흥 및 태권도공원 조성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태권도의 날’은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공휴일 아님)

 

자랑 외에 성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만들었으면


- 내가 생각하는 태권도의 날

영국과 필리핀에서 태권도를 가르쳐 봤던 경험으로 보면

태권도의 날이 제정되어 있었던 것은 적극 찬성한다.

그리고 그냥 기념식보다는 해외 보급, 특히 척박한 환경의 국가에

우선 지원하는 날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태권도인이면서 잘 알려져 있는 연예인인 배수지 양이

좋은 태권도 단체에 기부를 했다는 점도 너무 기분이 좋다.

 

JYP 건물 기둥 다 세워준 배수지 

태권도에 대한 나의 생각

품새를 좀 더 다이내믹하게 만든다고

아크로바틱 한 경기 품새 이런 거 말고,

기존 품새를 개량하고 좀 더 다이내믹하게 발차기가

들어갔으면 한다. 호신술도 제대로 체계화하는 것도 같이...

 

사실 산적은 니지 유의 리쿠를 응원한 것도

가라데 소녀라서 응원한 것으로 운동 그중에서도 무술을 한다는 점이었다.

무술을 통해서 얻어지는 내공은 다른 운동을 통해서

좀처럼 얻어지기 힘든 것들이라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드라마에서 액션 연기를 잘하던 배수지 양,

요즘 같은 코로나 블루 같은 우울한 상황에서

이쁜 미소보다 천백 배는 더 이쁜 행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파이팅! 태권소녀! 배수지! 

액션 연기 뒤에는 태권도 2단 

 

광복절은 다들 알아도 경술국치는 잘 모를 거다. 

하긴 역사의 어두운 면 혹은 약한 면은 알고 싶지도 않을 거니깐

하지만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날이다. 경술국치 이후로 우리네 땅에 기생하고 있는 토착 왜구들도 좀 돌이켜보고 


1. 경술국치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시련으로 부터도 배운다

- 한일 병합, 한일 합병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는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멸망하며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고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한반도 지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되어 식민지가 된 사건을 말한다. 

 

한일 병합 조약 또는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합병조약이다. 

한일 합방 조약이라고도 불린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졌고,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권피탈, 경술국치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일개 대신, 이완용이의 단독행동으로 생긴일앋

2. 경술국치가 있기까지
- 1904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정미 7 조약으로 군대 해산을 당하고,

유각서로 사법권과 감옥 사무까지 잃은 대한제국은

결국 일본 제국에 강제 병합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일 병합 조약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령이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이지, 사실상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인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일본은 중국(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세력들을 제거했고,

경술국치 즈음의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의 일부나 다름 없었던 상태였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이완용, 그 재산을 찾는 걸 도와줬던 나베

 

3. 배신의 아이콘, 이완용은 항상 다 등장했다.- 
- 이완용은 대한제국의 관료였지만 엄청난 매국노이다.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로 평가된다. 


1882년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폐망시켰다. (많이 배운 놈이 더 하다)

 

나라 팔아먹을 관상이다. 주변에 이런 놈 있나 잘 봐라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다.

 

- 경술국치 이후의 활동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이며, 일본제국에서의 작위는 후작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内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벌다.

일제로부터 받은 하사금을 주로 부동산 투기 등으로 불린

원조 부동산 투기꾼으로 지금의 토착 왜구들이

부동산에 집착하는 원조가 된 놈이다.

이완용 재산을 찾는 걸 도와주는 건 토착왜구 셀프인증이다

이석영 선생님, 8월의 독립운동가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진정한 양반.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독립전쟁 역사에 찬란한 자취를 남긴 독립군의 근간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실란가?

 

 

우리가 쪽바리 말 안 쓰게 만들어 주신 분 중 한 분이시다.

 

우리가 한국사능력시험 1급과 2급을 따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당당한 우리 독립운동역사의 한페이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이석영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자.

나중에 처죽이고 갈아마셔도 분이 안풀릴 천하의 매국노,

친일 매국노와 토착왜구의 시조새 같은 이완용도 다뤄보겠습니다.


1. 왜 이석영선생님인가?

 

부산광복기념관도 민주공원에 있다

 

- 부산민주공원에 있는 부산 중앙도서관에서 한동안 공부를 했었다. 21일 전까지

부산 민주공원에는 충혼탑 외에 부산 광복회관도 있고 그 건물 한켠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에 붙어 있던 8월의 독립운동가 포스터를 보고 결심했다.

게다가 8월15일 광화문 집회에 등장한 일장기는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우리 주변의 심정적 왜구, 뿌리까지 친일인 토착왜구들에 대한 경각심도 올리고 싶어서다.

 

 

친일따라지 셀프 인증하는 수구꼴통 극우세력들

 

2. 이석영 선생님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경학사

- 엘리트 오브 더 엘리트 이석영 선생님.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은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조선 후기, 이름만 양반인 쓰레기 지배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석영 선생님은 과거에 급제를 했다는 것은

엘리트 중 엘리트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이 두번이나 벼슬을 내릴 정도의 인재였지만

거부하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석영선생님 가족들의 망명 상상도

 

- 일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오르다.

1910년, 이석영 선생은 동생 이회영(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들 6형제들은 넷째 이회영(1867∼1932)의 건의에 따라

일가권속 60여 명을 이끌고 망명을 단행했다.

이들은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결의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이다.

 

-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를 먼저 세우다.

서간도에서 시작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는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한인들의 자치 조직을 세워,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는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 멸망 후 독립전쟁이라는 새로운 방략을 실천한 첫 시도였다.

 

1911년,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를 먼저 설립하고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 등을 실시, 인재를 양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연이은 1911년과 1912년 대흉년으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무장투쟁의 역사는 독립의 근거가 됩니다.

 

-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다. 

이석영 선생님의 기부금으로 시작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되고,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주변의 권유로 이석영 선생이 교장을 맡았습니다.

신흥학교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고,

1920년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이 졸업생들이 이후에 벌어지는 만주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한 마디로 신흥강습소와 경학사는 독립운동사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밀알이었습니다.

선생님 집안의 희생이 독립운동사가 있을 수 있게된 것입니다.

 

 

일단 선생님을 위해서 친일은 척결의 대상이다

 

3. 안타까운 이석영 선생님의 말년

-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님의

말년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의 표본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석영 선생은 노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당시 신문기사이다

 


《동아일보》193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부고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습니다.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석영(李石榮)이 금일(2월 16일) 오후 2시
상해 불조계 아이배로(亞爾培路) 서가고교우(徐家庫僑寓)에서 사망하다.”

이어 3월 1일자 기사에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영의 장례식이
2월 20일 상해에서 거행되었는데 유해는 상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독립운동 끝에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80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 아직까지 호의호식하는 친일파와 토착왜구를 제거하고

     독립운동가 집안을 그 재산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도서관 입구에 있는 포스터

 

오늘 이 글은 부산 민주공원에 위치한 부산 중앙도서관에서 씁니다.

즉,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되었지만 도서관은 다행히 문을 오는군요.

어제까지 대한민국은 때 아닌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었습니다.

 

246명 추가 발생이라 .... 

올해 초는 사이비 이단 신천지 사태가 전국을 휩쓸더니,

이번에는 미친놈 개신교 집단인 사랑 제일교회 전광훈 미친 게이와

수구꼴통 친일따리지들 때문에 완전 난리 났습니다.

게다가 포항에서는 서울집회를 다녀온 확진자가 도망가기까지 하는

무슨 신천지 사태의 확장팩도 아니고......


1. 부산시의 아침은 조용하다.

부산과 사하구는아치마지는 좀 낫다.

- 천만다행인 경우 되겠다. 하지만 오후 발표가 항상 폭탄이어서 좀 그렇다.

하지만 오늘 대한민국 전체의 상황 (0시 기준)은 우려스럽다.

이 것은 질병관리 본부에서 

2. 8.18 도끼만행 사건을 아는가?

-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 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인근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조선인민군 군인 30여 명이 도끼를 휘둘러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UN군 소속의 주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주한 미군 및 대한민국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8.18 판문점도끼만행사건

이 사건 이후 미군과 한국 특전사는 다시 미루나무를 벌목하는 동안

북한이 도발을 가하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생각으로 작전을 시작했지만

북한이 침묵하자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고 당시 북한군 초소를

박살 내는 선에서 작전을 종결짓고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사건 이전과 같은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지금은 경계 밖에 있던 양측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미루나무 둥치 둘레만큼의

둥근 시멘트 위에 도끼 만행 사건에 희생된 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판문점 관람 코스에 버스를 타고 추모비 앞을 지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스 안에서 이 추모비를 볼 수 있다.

 

이때 북한 침공을 하니 많이 하는 계획까지 미군이 세웠다고 한다.

 

난 전광훈이 도그쉐끼라는 말 해도 된다.

3. 나도 이번 전광훈 미친놈 집단 발광의 피해자다

- 부산 야행이라는 프로그램에 지원했었다.

그 어렵다는 무료 여행에 뽑혀서 아주 좋아라 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라서 취소되고 말았다.

 

좋다 말았다.

욕 나온다. 요즘 서울에서는 교회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등 돌린다는데

100만 순복음교회 신자가 56만으로 줄었다는 기사를 보니

내년이나 올해 하반기에 조사하면 더 줄어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도 신천지 같은 사이비 이단이나 대부분의 개신교는

하는 짓거리가 똑같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도 떳떳해하는

사회의 기생충 같은 무리 딱 그 수준이다. 

 

40미리 기관포로 그냥 수구꼴통 친일따라지는 정리했으면 한다

8월14일은 한민족 4대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 기념일입니다. 임진란 3대대첩은 넣어둬, 넣어둬! 우리는 계속되는 불매운동 하는 걸로~

안녕하세요. 새롭게 한국역사 카테고리를 만든 산적입니다.

이렇게 카테고리를 만들었으니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넣어야죠?

www.hansanf.org/

 

통영한산대첩축제

 

www.hansanf.org

오늘 적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8월14일이 올해 통영에서 열리는 한산도대첩 기념일이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간략하게 통영 충렬사에서 고유제만 합니다.

6시로 예정 되어 있습니다. 좀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한산도해전, 안골포해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저만 봐도 안골포해전만 봐도 "뭐지?" 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축소된 행사도 알릴 겸

우리 머리 속에 제대로 된 역사도 넣어 볼겸 정리 했습니다.

 

거북선은 돌격선


1. 한산도해전은 왜 한민 족 4대 대첩인가?

- 일단 상대적으로 자질구레한(?) 임진왜란 3대첩 부터 정리해보자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특징은 왜군의 제대로된 침공계획을 완전히 

좌절시킨 전투들로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시킨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

10배가 넘는 적을 깨뜨려 왜군이 한양에서 후퇴하게 만든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그리고 학이 어떻게 생긴진 모르는 초딩도 아는 유명한 학익진의 한산도대첩이 있습니다.

 

- 한산도대첩의 전쟁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산도대첩은 왜군의 원래 조선군과의 이상적인 작전계획인

"수륙병진작전 - 서해로 돌아가 한강과 대동강을 이용하여

왜군 육군에게 원활한 보급을 통해 완벽하게 조선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완전히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조선 육군과의 전투를 더 이상 제대로 펼칠 수 없게 되죠.

그리고 2차대전에서도 임팔전투와 태평양전투 등에서 일본은 보급문제가

또 발목을 잡아 자멸하게 됩니다. (교훈을 못 배우는 왜국)

 

임진왜란의 보급문제 미해결을 다시 재현하신 분

2.  여기서 잠깐 한민족 4대대첩도 알아보고 가자

-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 고구려 수나라의 2차 침입 물리침.   수의 별동대 30만을 요동 너머 있다는 요단강으로 보내줌.

 

-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요나라 (거란족)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한 일이 바로 귀주 대첩입니다.

요나라 군사 10만명을 앞서간 수나라 30만대군이 건너간 요단강을 건너가게 해줌.

 

-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행주치마 같은 이상한 얘기 보다는 권율장군이 조선육군 3대첩 중 하나인 이치전투의 지휘관이었으며,막판 위기 상황에 경기수사가 화살을 보급해줌으로써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보급은 항상 중요하다)

 

행주대첩 상상도 - 행주성은 토성으로 성이라기 보다는 진지에 가깝다

3. 한산도대첩을 본격적으로 분석해볼까?

- 한산도 대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전라도 바다에서 3번째로 경상도 바다로 진격해 들어가 이룬 승리로

왜군이 조선침공 전에 만든 작전계획을 완전 무.쓸.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노를 저었을 노꾼들도 정말 대단 오브 더 대단

- 앞선 1차와 2차 출정과의 차이점이 중요하다

1차 출정은 승리에 취해 민간인 노략질과 조선군을 얕잡아 본

왜군의 뒤통수를 친 거라고 보면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겼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1차 출정에는 42척 격침에 조선군은 1명의 부상만 기록합니다. 

 

2차출정은 왜군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덤볐습니다.

그래도 1차 출정때와 달리 대비 정도는 하고 있어서

우리 측도 피해자가 나옵니다. 67척 격침, 13명 사망.

 

3차 출정인 한산도대첩(한산도해전 + 안골포해전)은 

왜군의 수군대장 쿠키 요시다카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하여

70여척의 전선을 몰고 왔고 용인에서 1600명으로 조선군 5만대군을 물리쳐

제대로 "무쌍"을 찍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총 140척을 동원하여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군 사냥을 나온 격이었습니다.

즉, 왜군은 만반의 준비를 넘어 엄청난 전력을 동원한 거라

1차와 2차 출정과는 엄청나게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학익진은 원래 해전에서 쓰기 힘든 전술이다 훈련량이 엄청나야 한다

4. 한산도대첩은 2번의 해전으로 이루어진 거다.

- 제대로 싸운 한산도해전

한산도해전은 와스자카군이 맘 먹고 덤빈 경우로 전라좌수영군의 학익진과

전라우수영군과 경상우수영군이 보조로 만든 쌍학익진으로 왜군 73척중 

59척을 깨부신 전투였습니다. 솔직히 노량, 명량, 부산포 전투에 비하면

전과가 작은 편이지만 전술적 의미는 아주아주 큽니다.

여튼 왜군도 8000 ~ 9000가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탄 걸로 추정됩니다.

구석에 몰아넣고 하루 2번 2시간씩 왜군 팬 전투

- 겁먹고 숨은 왜군에게 린치를 가한 안골포해전

안골포라는 좁은 포구에 몰아넣고 하루 2번 2시간씩 린치를 가한 전투로

이 전투를 알게 되면 한산도해전 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습니다.

쫄아버린 왜군을 물때(밀물)에 맞춰 판옥선 2척씩 들어가 천자총통으로

조금씩 아작내서 42척 중 20여척을 파괴한 전투로

왜군의 나머지 20여척이 빤스런을 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전 제대로 싸우는 거 보다 뚜까 팬거 같은 안골포 해전이 .... 

5.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이 가능했던 이유를 본다면 

-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님, 

병법에도 원래 능했던 분으로 판옥선과 각종 화포의 장점을 결합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첨단 하이테크 시스템으로 전투를 이끔.

엄청난 훈련을 했던 것은 당연한 거 아니겠어?

 

- 천과 지를 알았던 부하장수들

어영담이란 할아배 장수가 나오는데, 이분이 남해바다 물길을

손금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길과 때(천시)를 알아 적절한 조언을 해줍니다.

 

- 열린 토론회

출정을 할 때마다 전투를 하기 전에 

부하장수나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과

꽤 오랜 토론을 하는 장면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오는데,

이런 토론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작전을

좀 더 제대로 다듬고, 작전을 부하 장수들과

더 잘 공유할 수 있었을 겁니다.

 

- 부하 군졸에 대한 배려

전사자들과 가족들에 대한 대우를 극진하게 직접 살펴

군졸들의 진정한 충성심을 만들어내는 거죠.

 

- 정찰은 언제나 옳다.

스타크래프트에서 늘 나오는 말이 정찰의 중요성이죠,

이미 물길과 물때를 제대로 알고 있어도

항상 정찰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죠,

한산도해전은 피난민의 제보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해군 훈련선 이름도 한산도함이다. 제대로 훈련한 성과를 보여준 한산도대첩에서 따온 듯

6. 한산도대첩이 끼친 영향

- 왜군은 해전 보다는 바닷가에 왜성을 만들기 시작해서

아주 많이 만들었습니다. 왜냐?

후방이 위험해서 적극적인 조선공략을 하지 못합니다.

보급이 안되니 전쟁수행능력이 완전 저하되어 버립니다.

 

- 왜군이 전라도 공략을 하려다 벌어진 진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은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이 성공했다면,

진주는 가볍게 지나쳐 갔을 왜군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급에 문제가 생겨 곡창지대인

전라도 공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진주대첩에도 도움이 되었다?

한산도대첩 이후 이순신장군이 장계를 올려 수군진영을 

한산도로 옮겨버려서 남해바다는 부산과 그 인근 해역이 아니면

왜군이 바다에서 얼씬 거릴 수 없어서 진주성 공략 시에

남강쪽으로 면한 성벽은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진주성의 한 축은 강, 그리고 북쪽, 보기에 왼쪽에 김시민 장군이 혜자를 파 뒀다.

7. 몇가지 잡담; 

- 난중일기는 7월로 되어있는데?

간단하다. 조선시대는 음력이었고 우리는 양력의 시대에 산다.

양력은 음력보다 1달 가량 늦다고 보면 된다. 

 

- 왜? 승전보고서가 "견내량 파왜병장" 일까?

임진왜란 당시에는 한산도는 중요한 섬이 아닌 무인도,

하지만 왜군이 지나서 한산도 앞바다로 나온 중요 포인트인

견내량이 조선시대에는 중요지점으로 근처에 중요포구가

있어서 견내량 파왜병장 이란 장계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견내량파왜병장, 선조에게 보낸 장계. 

- 대첩이란 말이 붙으려면,

그 당시의 전황은 당연히 뒤집어 엎어야만 하고,

향후 전쟁에서 그 전투가 계속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적다보니, 적선을 더 많이 깨부순 전투가 많지만

전체 전쟁상황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의 영향을 끼친 전투가 바로

한산도대첩이고 그 중 한 전투였던 안골포전투는 정말 속이 후련했습니다.

 

쓰다가 기분 많이 좋아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