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은 한민족 4대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 기념일입니다. 임진란 3대대첩은 넣어둬, 넣어둬! 우리는 계속되는 불매운동 하는 걸로~

안녕하세요. 새롭게 한국역사 카테고리를 만든 산적입니다.

이렇게 카테고리를 만들었으니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넣어야죠?

www.hansanf.org/

 

통영한산대첩축제

 

www.hansanf.org

오늘 적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8월14일이 올해 통영에서 열리는 한산도대첩 기념일이기 떄문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로 간략하게 통영 충렬사에서 고유제만 합니다.

6시로 예정 되어 있습니다. 좀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나는 한산도해전, 안골포해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저만 봐도 안골포해전만 봐도 "뭐지?" 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축소된 행사도 알릴 겸

우리 머리 속에 제대로 된 역사도 넣어 볼겸 정리 했습니다.

 

거북선은 돌격선


1. 한산도해전은 왜 한민 족 4대 대첩인가?

- 일단 상대적으로 자질구레한(?) 임진왜란 3대첩 부터 정리해보자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특징은 왜군의 제대로된 침공계획을 완전히 

좌절시킨 전투들로 왜군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시킨 김시민장군의 진주대첩

10배가 넘는 적을 깨뜨려 왜군이 한양에서 후퇴하게 만든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그리고 학이 어떻게 생긴진 모르는 초딩도 아는 유명한 학익진의 한산도대첩이 있습니다.

 

- 한산도대첩의 전쟁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산도대첩은 왜군의 원래 조선군과의 이상적인 작전계획인

"수륙병진작전 - 서해로 돌아가 한강과 대동강을 이용하여

왜군 육군에게 원활한 보급을 통해 완벽하게 조선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완전히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조선 육군과의 전투를 더 이상 제대로 펼칠 수 없게 되죠.

그리고 2차대전에서도 임팔전투와 태평양전투 등에서 일본은 보급문제가

또 발목을 잡아 자멸하게 됩니다. (교훈을 못 배우는 왜국)

 

임진왜란의 보급문제 미해결을 다시 재현하신 분

2.  여기서 잠깐 한민족 4대대첩도 알아보고 가자

-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 고구려 수나라의 2차 침입 물리침.   수의 별동대 30만을 요동 너머 있다는 요단강으로 보내줌.

 

-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요나라 (거란족)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한 일이 바로 귀주 대첩입니다.

요나라 군사 10만명을 앞서간 수나라 30만대군이 건너간 요단강을 건너가게 해줌.

 

-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행주치마 같은 이상한 얘기 보다는 권율장군이 조선육군 3대첩 중 하나인 이치전투의 지휘관이었으며,막판 위기 상황에 경기수사가 화살을 보급해줌으로써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보급은 항상 중요하다)

 

행주대첩 상상도 - 행주성은 토성으로 성이라기 보다는 진지에 가깝다

3. 한산도대첩을 본격적으로 분석해볼까?

- 한산도 대첩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 전라도 바다에서 3번째로 경상도 바다로 진격해 들어가 이룬 승리로

왜군이 조선침공 전에 만든 작전계획을 완전 무.쓸.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노를 저었을 노꾼들도 정말 대단 오브 더 대단

- 앞선 1차와 2차 출정과의 차이점이 중요하다

1차 출정은 승리에 취해 민간인 노략질과 조선군을 얕잡아 본

왜군의 뒤통수를 친 거라고 보면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제대로 덤비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겼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1차 출정에는 42척 격침에 조선군은 1명의 부상만 기록합니다. 

 

2차출정은 왜군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덤볐습니다.

그래도 1차 출정때와 달리 대비 정도는 하고 있어서

우리 측도 피해자가 나옵니다. 67척 격침, 13명 사망.

 

3차 출정인 한산도대첩(한산도해전 + 안골포해전)은 

왜군의 수군대장 쿠키 요시다카에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하여

70여척의 전선을 몰고 왔고 용인에서 1600명으로 조선군 5만대군을 물리쳐

제대로 "무쌍"을 찍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총 140척을 동원하여 이순신 장군의 전라좌수영군 사냥을 나온 격이었습니다.

즉, 왜군은 만반의 준비를 넘어 엄청난 전력을 동원한 거라

1차와 2차 출정과는 엄청나게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학익진은 원래 해전에서 쓰기 힘든 전술이다 훈련량이 엄청나야 한다

4. 한산도대첩은 2번의 해전으로 이루어진 거다.

- 제대로 싸운 한산도해전

한산도해전은 와스자카군이 맘 먹고 덤빈 경우로 전라좌수영군의 학익진과

전라우수영군과 경상우수영군이 보조로 만든 쌍학익진으로 왜군 73척중 

59척을 깨부신 전투였습니다. 솔직히 노량, 명량, 부산포 전투에 비하면

전과가 작은 편이지만 전술적 의미는 아주아주 큽니다.

여튼 왜군도 8000 ~ 9000가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탄 걸로 추정됩니다.

구석에 몰아넣고 하루 2번 2시간씩 왜군 팬 전투

- 겁먹고 숨은 왜군에게 린치를 가한 안골포해전

안골포라는 좁은 포구에 몰아넣고 하루 2번 2시간씩 린치를 가한 전투로

이 전투를 알게 되면 한산도해전 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습니다.

쫄아버린 왜군을 물때(밀물)에 맞춰 판옥선 2척씩 들어가 천자총통으로

조금씩 아작내서 42척 중 20여척을 파괴한 전투로

왜군의 나머지 20여척이 빤스런을 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전 제대로 싸우는 거 보다 뚜까 팬거 같은 안골포 해전이 .... 

5.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이 가능했던 이유를 본다면 

-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님, 

병법에도 원래 능했던 분으로 판옥선과 각종 화포의 장점을 결합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최첨단 하이테크 시스템으로 전투를 이끔.

엄청난 훈련을 했던 것은 당연한 거 아니겠어?

 

- 천과 지를 알았던 부하장수들

어영담이란 할아배 장수가 나오는데, 이분이 남해바다 물길을

손금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길과 때(천시)를 알아 적절한 조언을 해줍니다.

 

- 열린 토론회

출정을 할 때마다 전투를 하기 전에 

부하장수나 전라우수사 이억기 장군과

꽤 오랜 토론을 하는 장면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오는데,

이런 토론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작전을

좀 더 제대로 다듬고, 작전을 부하 장수들과

더 잘 공유할 수 있었을 겁니다.

 

- 부하 군졸에 대한 배려

전사자들과 가족들에 대한 대우를 극진하게 직접 살펴

군졸들의 진정한 충성심을 만들어내는 거죠.

 

- 정찰은 언제나 옳다.

스타크래프트에서 늘 나오는 말이 정찰의 중요성이죠,

이미 물길과 물때를 제대로 알고 있어도

항상 정찰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죠,

한산도해전은 피난민의 제보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해군 훈련선 이름도 한산도함이다. 제대로 훈련한 성과를 보여준 한산도대첩에서 따온 듯

6. 한산도대첩이 끼친 영향

- 왜군은 해전 보다는 바닷가에 왜성을 만들기 시작해서

아주 많이 만들었습니다. 왜냐?

후방이 위험해서 적극적인 조선공략을 하지 못합니다.

보급이 안되니 전쟁수행능력이 완전 저하되어 버립니다.

 

- 왜군이 전라도 공략을 하려다 벌어진 진주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은

이순신장군의 활약으로 벌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이 성공했다면,

진주는 가볍게 지나쳐 갔을 왜군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급에 문제가 생겨 곡창지대인

전라도 공략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진주대첩에도 도움이 되었다?

한산도대첩 이후 이순신장군이 장계를 올려 수군진영을 

한산도로 옮겨버려서 남해바다는 부산과 그 인근 해역이 아니면

왜군이 바다에서 얼씬 거릴 수 없어서 진주성 공략 시에

남강쪽으로 면한 성벽은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진주성의 한 축은 강, 그리고 북쪽, 보기에 왼쪽에 김시민 장군이 혜자를 파 뒀다.

7. 몇가지 잡담; 

- 난중일기는 7월로 되어있는데?

간단하다. 조선시대는 음력이었고 우리는 양력의 시대에 산다.

양력은 음력보다 1달 가량 늦다고 보면 된다. 

 

- 왜? 승전보고서가 "견내량 파왜병장" 일까?

임진왜란 당시에는 한산도는 중요한 섬이 아닌 무인도,

하지만 왜군이 지나서 한산도 앞바다로 나온 중요 포인트인

견내량이 조선시대에는 중요지점으로 근처에 중요포구가

있어서 견내량 파왜병장 이란 장계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견내량파왜병장, 선조에게 보낸 장계. 

- 대첩이란 말이 붙으려면,

그 당시의 전황은 당연히 뒤집어 엎어야만 하고,

향후 전쟁에서 그 전투가 계속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적다보니, 적선을 더 많이 깨부순 전투가 많지만

전체 전쟁상황의 향방을 결정할 정도의 영향을 끼친 전투가 바로

한산도대첩이고 그 중 한 전투였던 안골포전투는 정말 속이 후련했습니다.

 

쓰다가 기분 많이 좋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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