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선생님, 8월의 독립운동가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진정한 양반.

올해는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

독립전쟁 역사에 찬란한 자취를 남긴 독립군의 근간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실란가?

 

 

우리가 쪽바리 말 안 쓰게 만들어 주신 분 중 한 분이시다.

 

우리가 한국사능력시험 1급과 2급을 따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당당한 우리 독립운동역사의 한페이지,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이석영 선생님에 대해 알아보자.

나중에 처죽이고 갈아마셔도 분이 안풀릴 천하의 매국노,

친일 매국노와 토착왜구의 시조새 같은 이완용도 다뤄보겠습니다.


1. 왜 이석영선생님인가?

 

부산광복기념관도 민주공원에 있다

 

- 부산민주공원에 있는 부산 중앙도서관에서 한동안 공부를 했었다. 21일 전까지

부산 민주공원에는 충혼탑 외에 부산 광복회관도 있고 그 건물 한켠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도서관에 붙어 있던 8월의 독립운동가 포스터를 보고 결심했다.

게다가 8월15일 광화문 집회에 등장한 일장기는 결심을  실행으로 옮기는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우리 주변의 심정적 왜구, 뿌리까지 친일인 토착왜구들에 대한 경각심도 올리고 싶어서다.

 

 

친일따라지 셀프 인증하는 수구꼴통 극우세력들

 

2. 이석영 선생님과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경학사

- 엘리트 오브 더 엘리트 이석영 선생님.

8월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은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조선 후기, 이름만 양반인 쓰레기 지배층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석영 선생님은 과거에 급제를 했다는 것은

엘리트 중 엘리트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이 두번이나 벼슬을 내릴 정도의 인재였지만

거부하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이석영선생님 가족들의 망명 상상도

 

- 일가족을 데리고 망명길에 오르다.

1910년, 이석영 선생은 동생 이회영(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시영(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 6형제와 일가족 전체가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게 됩니다.

이들 6형제들은 넷째 이회영(1867∼1932)의 건의에 따라

일가권속 60여 명을 이끌고 망명을 단행했다.

이들은 오로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결의로

가문 차원에서 집단 망명한 것이다.

 

-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를 먼저 세우다.

서간도에서 시작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는 비록 남의 나라 땅이지만

한인들의 자치 조직을 세워, 독립군 사관을 양성한다는 꿈을 실현했던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 멸망 후 독립전쟁이라는 새로운 방략을 실천한 첫 시도였다.

 

1911년,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耕學社)’를 먼저 설립하고 
농업개발, 민족교육, 군사교육 등을 실시, 인재를 양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연이은 1911년과 1912년 대흉년으로

재정난에 부딪히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무장투쟁의 역사는 독립의 근거가 됩니다.

 

-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다. 

이석영 선생님의 기부금으로 시작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가 설립되고,

1912년 ‘신흥학교’로 개편되면서 주변의 권유로 이석영 선생이 교장을 맡았습니다.

신흥학교는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고,

1920년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이 졸업생들이 이후에 벌어지는 만주 독립군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한 마디로 신흥강습소와 경학사는 독립운동사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밀알이었습니다.

선생님 집안의 희생이 독립운동사가 있을 수 있게된 것입니다.

 

 

일단 선생님을 위해서 친일은 척결의 대상이다

 

3. 안타까운 이석영 선생님의 말년

-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님의

말년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의 표본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석영 선생은 노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당시 신문기사이다

 


《동아일보》1934년 2월 28일자 기사에는

독립운동가 이석영의 부고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알렸습니다.

“만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석영(李石榮)이 금일(2월 16일) 오후 2시
상해 불조계 아이배로(亞爾培路) 서가고교우(徐家庫僑寓)에서 사망하다.”

이어 3월 1일자 기사에는, “만주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사망한 이석영의 장례식이
2월 20일 상해에서 거행되었는데 유해는 상해 홍교로(虹橋路)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독립운동 끝에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도 안타깝지만,

더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80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의 빈민가를 전전하며

두부찌꺼기인 콩비지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 아직까지 호의호식하는 친일파와 토착왜구를 제거하고

     독립운동가 집안을 그 재산으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도서관 입구에 있는 포스터

 

+ Recent posts